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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승 Heeseung Chung
사진을 작업의 주된 매체로 다루는 정희승은 사진의 재현성과 그 한계에 대해 사유하고 책과 오브제, 설치의 형태로 매체의 확장과 실험을 지속한다. 2014년 박연주와 출판사 헤적프레스를 설립하여 동시대 다양한 시각 예술가들과 협업하는 출판 프로젝트 ‘Float Series’를 발간하고 있다. 작가는 이 프로젝트에서 이미지와 텍스트, 구조와 물성 간의 유기적인 상호작용으로 책을 인식한다. 나아가 책과 인쇄물을 작업의 중요한 일부로 탐구하고 있다.
로즈는 로즈가 로즈인 것 Rose Is A Rose Is A Rose (2016)
〈로즈는 로즈가 로즈인 것〉은 본래 전시와 사진집으로 선보인 작품이다. 동명의 사진집은 ‘의미의 불가능성에 대한 세 개의 소품들’이라는 부제 아래 세 개의 소주제 「부드러운 단추들(Tender Buttons)」, 「로즈는 로즈가 로즈인 것(Rose is a rose is a rose)」, 「사라짐(Disappearance)」으로 나뉘어 있다.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의 동명 시에서 제목을 빌려온 「부드러운 단추들」은 유동적이고 상호의존적인 관계에 놓인 사물과 신체, 그것에 붙여진 이름과 느슨한 관계를 맺는 대상들을 보여준다. 작가는 사춘기가 일찍 와서 힘들어하던 딸을 보며 성장통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며 이 작업을 시작했다. 사춘기는 사물을 낯설고 새롭게 느끼며 지각하는 시기이고 고통과 눈물이 함께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오롯이 완성된 전체로 인식하기 위해 그 고통의 시간을 잘 통과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부드러운 단추들」 앞머리에 소개한 스타인의 다른 동화책 『세계는 둥글어(The World is Round)』 속 주인공 로즈(Rose)도 자신의 이름에 대한 고민으로 눈물짓는 9세 소녀다. 로즈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모험에서 아름드리나무에 ‘Rose is a Rose is a Rose...’를 둥글게 연달아 새겨넣으며 여정을 마무리한다. 이어지는 두 번째 소주제에서는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장미의 이름』 인용문과 장미 사진 연작이 등장한다.
2016년 진행한 동명의 전시는 사진집 『로즈는 로즈가 로즈인 것』을 갤러리 맥락에 맞게 재현하는 쪽에 가까웠다. 책에서 전시로 이어진 매체의 실험은 이제 온라인으로 이어진다. 작가는 각 소주제 앞머리에서 각기 다른 출처의 짧은 인용구를 언급하며 이어지는 사진 연작들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서로 다른 주제가 담긴 사진 소품집은 소설 속 로즈가 나무에 새긴 글귀처럼 다시 둥글게 이어지며 ‘의미의 불가능성’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변주한다.

로즈는 로즈가 로즈인 것
의미의 불가능성에 대한 세 개의 소품들

1. 부드러운 단추들
2. 로즈는 로즈가 로즈인 것
3. 사라짐

정희승

아주 먼 옛날 세계는 둥글어서 여기저기 빙글빙글 다닐 수 있었다.

어디서든 어딘가로 갈 수 있었고 어디든 남자, 여자, 아이들, 강아지, 소, 멧돼지, 어린 토끼, 고양이, 도마뱀, 동물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강아지, 고양이, 양, 토끼와 도마뱀 그리고 아이들 누구든 세계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 했고 자기 자신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로즈가 있었다.

그녀 이름은 로즈였다. 만일 내 이름이 로즈가 아니더라도 나는 로즈일까. 그녀는 생각하고 또 생각하곤 했다.

만일 내 이름이 로즈가 아니더라도 나는 로즈일까. 나에게 쌍둥이가 있었더라면 그래도 나는 로즈였을까.

그녀 이름은 항상 로즈였고 아버지 이름은 밥, 어머니 이름은 케이트, 삼촌 이름은 윌리엄, 고모 이름은 글로리아, 할머니 이름은 루시였다. 그들 모두 이름이 있었고 그녀 이름은 로즈였지만 내 이름이 로즈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외치곤 했다. 내 이름이 로즈가 아니더라도 나는 로즈일까.

정말로 세계는 온통 둥글어서 여기저기 빙글빙글 다닐 수 있었다.

거트루드 스타인, 『세계는 둥글어』

1. 부드러운 단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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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rtius equi(말의 세 번째)…….” 나는 피식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뭐라고 했느냐?” 사부님이 물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깐 살바토레 수도사가 한 말이 생각나서 웃었습니다. 살바토레 수도사는, 저기 있는 세 번째 말에다 자기만 아는 마법을 걸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살바토레 수도사가 저 말을 가리키면서 tertius equi라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 u가 되고 말지 않겠습니까?”

“u라니?” 별생각 없이 내 말을 듣고 있던 윌리엄 수도사가 반문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tertius equi라고 해버리면 ‘세 번째 말’이라는 뜻이 아니고, equs(말)라는 단어의 세 번째 글자라는 뜻이 되어 버리지 않습니까? ‘세 번째 말’이 아니라 u가 되고 만 셈이니 이런 엉터리 라틴어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

사부님의 얼굴이 내 쪽을 향했다. 어둠 속인데도 나는 그의 얼굴이 활짝 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소리쳤다. “네 이놈! 복 받거라! 오냐, 오냐, suppositio materialis[소재의 오해]와 관련된 문제였구나! 아, de re(사물에 대한 것)가 아니라 de dicto(말에 대한 것)이었구나! 아이고 이런 돌대가리!”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이윤기 옮김(열린책들, 2009)

2. 로즈는 로즈가 로즈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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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아직 한 가지 이름이 더 남아 있으니,

당신은 상상도 못할 이름,

인간이 아무리 연구한들 찾아낼 수 없는 그런 이름 –

고양이 혼자만 알고 있을 뿐, 절대로 말해주지 않는 이름

고양이가 심오한 명상에 잠겨 있는 걸 발견한다면,

그것은 늘 같은 이유

바로 깊은 생각에 빠져 있기 때문

자신의 이름을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음미하는 시간

말할 수 없는, 말로 하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고 불가해한 단 하나의 이름

T. S. 엘리엇, 『캣츠-노련한 고양이에 관한 늙은 주머니쥐의 책』, 김승희 옮김(문학세계사, 2008)

3. 사라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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